매거진

수안보: 온천과 공중목욕의 역사

중세 지리 기록에서 근대 목욕탕과 가족 여행까지.

「대동여지도」 일부: 한강 가의 충주(忠州)와 수회리(水回里)를 지나 수안보로 이어지는 남쪽 길
Kim Jeong-ho, Daedongyeojido (1861), sheet 14-4, Kyujanggak Institute, Seoul National University.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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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갈래의 역사

지금의 충북 충주에 있는 수안보는 한국 목욕의 역사에서 기록이 잘 남은 곳이에요. 옛 지리 기록에 온천이 나오고, 뒤로 가면 욕사, 영업 목욕탕, 여관, 온천 관광지가 커 가는 과정이 보여요.

이때 세 가지를 나눠 보면 좋아요. 온천이 처음 언급된 때, 목욕 건물이 들어선 때, 근대 관광이 시작된 때. 그러면 "1018년 첫 기록", "한국 최초의 온천", "임금의 온천" 같은 익숙한 말들이 조금 다르게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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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1018년의 뜻

이른 기록은 『고려사』 56권 지리지의 장연현 항목에 있어요.

장연은 본래 고구려의 상모현이었고, 현종 9년(1018)에 이 이름이 되어 충주에 속하게 됐다고 적혀 있어요. 그리고 따로 온천이 있다는 한 줄이 붙어 있어요.

온천이 알려져 있었고 기록됐다는 건 분명해요. 하지만 1018년은 이름과 소속이 바뀐 해예요. 그해에 온천을 발견했다거나, 처음 썼다거나, 목욕탕이 생겼다는 말은 없어요.

게다가 『고려사』는 1018년보다 한참 뒤인 조선 시대에 편찬됐어요. 가장 정확한 표현은 "『고려사』 지리지에 온천이 기록돼 있다"예요. 1018년을 발견 연도로 부르는 건 원문보다 더 많이 읽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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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아홉 칸 건물

세종실록 지리지 충주목 연풍현 항목에는 더 자세한 내용이 있어요.

온천이 현 북쪽 20리, 안부역 서쪽에 있고 건물이 아홉 칸이라고 적혀 있어요. 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세는 전통 건축 단위라서, 방이나 객실이 아홉 개라는 뜻으로 읽으면 안 돼요.

조선 초에는 이미 온천 옆에 건물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냥 노천의 웅덩이만은 아니었던 거죠.

다만 탕이 어떻게 배치됐는지, 욕조 모양이 어땠는지, 남녀가 따로 씻었는지는 나오지 않아요. 아홉 칸이라는 말만으로는 알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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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 옆의 온천

수안보의 위치도 중요해요.

한국문화원연합회는 성현의 『용재총화』를 인용해, 충주 안부역 근처 큰길 옆에 아주 뜨겁지 않고 미지근한 온천이 있다고 소개해요. 세종실록도 온천을 안부역 옆으로 적고 있어요.

그러니 이 온천은 길손들이 다니는 길 가까이, 당시 교통망이 닿는 곳에 있었어요.

여행과 목욕을 함께 이야기할 근거로는 충분해요. 하지만 과거 보러 한양 가던 선비들이 모두 여기 들렀다는 증거는 아니에요. 그러려면 더 구체적인 기록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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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에서 목욕탕 영업으로

충북연구원 지역 아카이브는 수안보가 간단한 욕사에서 큰 목욕탕과 여관 동네로 바뀐 과정을 정리해 두었어요.

이 연표는 아카이브가 지역사를 근래에 재구성한 거예요. 당시 건축 허가, 영업 기록, 신문과 직접 대조해 보지는 않았어요.

1885온천정이 생김. 간단한 나무 욕조, 남녀 구분.
1908간단한 욕사를 지음. 남녀뿐 아니라 조선인과 일본인도 나눔.
1916기존 욕탕을 근대식 목욕탕으로 다시 지음.
1920년대 후반근대 장비로 온천공을 뚫고, 목욕탕과 여관이 늘어남.
1931괴산 군수 이해용이 안보탕을 엶.
1945년 이후운영이 일본인에게서 면사무소로 넘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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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가 보여 주는 것

이 시기에 수안보는 땅에서 솟는 따뜻한 물을 바탕으로 목욕탕과 유료 서비스가 중심인 동네가 됐어요. 1900년대 초 조선인과 일본인의 탕을 나눴다는 건, 목욕에도 당시의 불평등한 사회가 비쳤다는 걸 보여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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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공은 언제 뚫었을까

자료마다 날짜가 다 맞지는 않아요.

한국관광공사 글은 근대식 굴착 장비를 처음 쓴 해를 1926년으로, 충북연구원 아카이브와 충북 관광 사이트는 1929년으로 적어요. 두 단계의 공사인지 한쪽의 실수인지 당시 기록으로 확인되기 전까지는 "1920년대 후반"이 안전해요.

이건 근대사의 한 단계에 대한 의문일 뿐이에요. 훨씬 오래된 온천과 건물에 대한 기록은 그대로 믿을 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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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 신혼여행, 가족 여행, 대통령

전쟁이 끝난 뒤 수안보는 점점 국내 여행지가 됐어요.

한국관광공사는 1970년대엔 인기 신혼여행지, 1980년대엔 가족 여행지였다고 설명해요. 목욕이 여관에서 하루이틀 묵는 여행의 일부가 된 거예요.

국가기록원은 이승만, 최규하 대통령의 방문을 소개해요. 이승만은 온천지구 입구 근처에 기념식수를 했고, 최규하는 수안보에서 휴가를 보냈어요.

1997년에는 관광특구로 지정됐고, 충북도의회 기록에서도 확인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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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쓰는 온천수

지금의 수안보는 온천수를 함께 관리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저수조를 둔 집중 공급 방식으로 수원을 보호하고 공급을 안정시킨다고 설명해요. 목욕탕마다 따로 물을 끌어 쓰는 게 아니라 같은 공동 시설에 연결돼 있어요.

목욕탕에는 욕조와 탈의실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 물을 모으고 저장하고 보내야 하는데, 수안보는 그 일을 동네 전체가 함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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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말들, 확인해 보기

  • "3만 년 된 온천." 관광 자료에는 온천이 3만 년쯤 됐다고 나와요. 온천의 나이와 사람이 거기서 목욕한 기간은 다른 문제라, 3만 년 동안 목욕해 왔다는 뜻은 아니에요.
  • "한국 최초의 온천." 이것도 홍보 자료에서 나온 말이에요. 최초가 처음 솟은 건지, 처음 기록된 건지, 처음 발견된 건지, 처음 영업한 건지에 따라 다르고, 자료로는 어느 쪽도 전국 단위로 가릴 수 없어요.
  • "태조와 숙종의 온천." 관광·지역 문화 자료는 두 임금을 수안보와 잇지만, 두 임금이 여기 왔다는 원 기록은 찾지 못했어요. 태조실록에서 찾은 1393년 음력 4월 25일 기록도 임금이 온천에서 돌아왔다고만 하고 어느 온천인지는 없어요. 임금과의 인연은 나중에 생긴 이야기 쪽에 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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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보의 자리

수안보는 최초이거나 가장 오래됐거나 임금이 아꼈던 곳이 아니어도 충분히 의미 있어요. 『고려사』에 적힌 온천, 조선 초 아홉 칸 건물, 큰길 옆 자리, 영업 목욕탕, 그리고 신혼여행과 가족 여행, 관광까지, 기록 자체가 길어요.

몇백 년 동안 온천에는 건물이 생기고, 손님이 생기고, 여관과 공동 급수 시설이 생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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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려사』, 태조실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db.history.go.kr),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세종실록 지리지: sillok.history.go.kr
  • 『용재총화』: 한국문화원연합회 (ncms.nculture.org)
  • 1885–1945 연표와 굴착 연도: 충북연구원 아카이브 (archive.chungbuk.re.kr)
  • 굴착 연도, 신혼여행과 가족 여행: 한국관광공사 (korean.visitkorea.or.kr)
  • 3만 년, "최초의 온천", 굴착 연도: 충북 관광 (tour.chungbuk.go.kr)
  • 대통령 방문: 국가기록원 (theme.archives.go.kr)
  • 1997년 관광특구: 도의회 기록 (clik.nanet.go.kr)
  • 공동 급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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