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한국 목욕의 역사: 신화 속 샘물에서 찜질방까지

한국 사람들은 천 년이 훨씬 넘게 목욕을 해 왔어요. 다만 지금처럼 함께 쓰는 온탕에 몸을 담그고 때를 미는 방식은 아니었어요.

신윤복의 「단오풍정」: 단오날 계곡에서 몸을 씻는 여인들과 그네 타고 머리 땋는 여인들
Shin Yun-bok, Dano Pungjeong (late 18th century), Kansong Art Museum.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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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에도 여러 갈래가 있어요

개울에서 씻는 것, 온천에 가는 것, 의례 전에 몸을 씻는 것, 돈을 내고 목욕탕을 쓰는 것은 각기 다른 배경에서 생겨났어요. 옛 기록을 보면 목욕하는 이유도, 장소도, 의미도 시대마다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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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건국 신화 속 목욕

가장 잘 알려진 이른 기록은 『삼국유사』에 있어요. 신라 시조 혁거세 이야기에서 알에서 나온 아이를 동천이라는 샘에서 씻기자 몸에서 빛이 났다고 해요.

몇백 년 뒤에 적힌 건국 신화라, 신라 사람들이 실제로 얼마나 자주 씻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여기서 목욕은 남다른 임금의 등장과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에요.

『삼국사기』에는 좀 더 현실적인 기록이 있어요. 고구려 서천왕 17년(286년) 조에 왕의 아우 일우와 소발이 병을 핑계로 온천에 가서 무리를 모았다고 나와요.

고구려 왕실 주변에서 온천을 알고 썼다는 건 알 수 있지만, 일반 백성도 온천욕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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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신의 눈에 비친 목욕

송나라 사신 서긍은 1123년 고려에 와서 본 것을 『선화봉사고려도경』, 흔히 『고려도경』이라 부르는 책에 남겼어요.

23권 씻기와 빨래 대목에서, 고려 사람들은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 목욕하고 여름에는 하루 두 번 씻으며, 남녀가 옷을 물가에 벗어 두고 개울에서 씻는다고 적었어요.

외국인 한 사람이 한 번 방문하고 쓴 기록이라 모든 지역과 계층을 대표하지는 않아요. 개울에서 씻었다는 것이 실내 혼욕탕이 있었다는 증거도 아니고요. 자주 인용되는 "고려 사람은 하루 서너 번 목욕했다"는 말도 원문보다 부풀려진 거예요. 서긍이 쓴 건 여름에 하루 두 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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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름 풍속과 의례 전 목욕

유교 때문에 조선 사람들이 목욕을 꺼렸다는 말이 흔해요. 몸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생각이 씻는 방식에 영향을 준 건 맞지만, 씻는 일과 의례 준비, 계절 풍속은 여전히 중요했어요.

음력 6월 15일 유두가 그 예예요. 19세기 『동국세시기』 같은 책에는 이날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몸을 씻어 액을 쫓았다고 나와요. 여름 더위를 식히면서 건강을 비는 풍속이었죠. 다만 19세기 책이 오래된 풍속이라고 했다고 해서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까지 알 수는 없어요.

이 페이지 맨 위 그림, 18세기 후반 신윤복의 「단오풍정」에는 음력 5월 5일 단오에 계곡에서 몸을 씻는 여인들이 나와요.

목욕은 제사나 중요한 일을 앞둔 준비이기도 했어요. 목욕재계(沐浴齋戒)는 몸을 씻는 일과 몸가짐·마음가짐을 가다듬는 일을 함께 이르는 말로, 차분하고 경건하게 그 자리에 나아가기 위한 것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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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 온천과 한증소

온천은 임금이 몸을 회복하러 가는 곳이었어요. 세종실록에는 1441년 음력 3월 20일 어가가 온천의 행궁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런 행차에는 숙소와 수행원, 큰 행렬이 따라야 했으니 가벼운 나들이가 아니라 나랏일이었어요.

실록에는 열로 땀을 내는 한증도 나와요. 1422년 음력 10월 2일 기록은 한증소에 관한 것인데, 증상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땀을 내게 해서 죽은 사람이 있다는 보고예요. 그래서 의원이 먼저 환자를 진찰해 한증이 맞는지 정하게 하고, 진찰을 소홀히 해 탈이 나면 의원과 승려에게 책임을 묻기로 했어요.

그때도 열은 병자를 돌보는 방법이었고,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고 사우나가 병을 고치거나 독소를 빼 준다는 현대적 근거가 되는 건 아니에요. 병자를 치료하고 구휼하던 한증소는 지금의 찜질방과는 다른 곳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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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신문 속 목욕탕

신문 광고를 보면 20세기 초 서울에는 이미 돈 내고 쓰는 목욕탕이 있었어요. 서울기록원은 1901년 취향관의 욕탕 수리와 새 온탕 광고, 1902년 장수정의 무료 목욕 안내, 1904년 혜천탕 개업 광고를 소개해요. 초기 목욕탕 중에는 목욕과 함께 음식, 술, 놀거리를 팔던 곳도 있었어요.

그러니 한국 근대 목욕탕의 역사가 1920년대의 어느 한 목욕탕에서 시작됐다는 흔한 설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무엇을 "근대 공중목욕탕"으로 볼지에 따라 달라지거든요. 개업 광고로 가게가 있었다는 건 알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갔는지는 알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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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동네 목욕탕

1945년 이후 몇십 년 동안 공중목욕은 도시 위생과 공공 서비스의 문제가 됐어요. 1960년 3월 12일 서울 장석동에 시립 목욕탕이 문을 열었고, 개장 사진이 서울기록원에 남아 있어요. 그해 7월 서울시는 관리와 요금을 포함한 운영 조례를 만들었어요. 목욕탕이 보건·복지 시설일 수 있었던 거예요.

지금 한국 목욕의 상징인 때수건도 근대의 물건이에요. 정부 간행물은 1967년 김필곤이 개발했고 이태리타월이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원단에서 왔다고 설명해요. 다른 사람을 개발자로 보는 이야기도 있어요(이태리타월 글 참고). 어느 쪽이든 때수건은 근대 제조업의 역사이고, 그 연도로 한국 사람들이 언제부터 때를 밀었는지, 세신사가 언제 생겼는지는 알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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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부터: 찜질방

찜질방은 목욕에 다른 여가를 더했어요. 『2008 여가백서』는 1990년대 초에 등장한 찜질방을 목욕탕, 사우나, 찜질방, 식당, 오락 시설을 갖춘 복합 시설로 설명해요. 씻고 바로 나가는 곳이 아니라 쉬고 먹고 하루를 보내는 곳이 된 거예요.

지금도 바뀌는 중이에요. 서울기록원에는 작은 동네 목욕탕이 문을 닫고, 큰 스파와 찜질방이 생기고, 오래된 목욕탕이 카페나 문화 공간으로 바뀐 기록이 쌓이고 있어요. 목욕탕은 도시의 일상이자 웰니스 공간이고, 동네의 기억을 어디에 남길지에 대한 고민의 일부이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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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삼국유사,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db.history.go.kr)
  • 고려도경: 한국학중앙연구원 (dh.aks.ac.kr), contents.history.go.kr
  • 유두, 목욕재계: 한국민속대백과사전 (folkency.nfm.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 세종실록: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초기 목욕탕 광고, 1960년 장석동 목욕탕, 목욕탕 폐업: 서울기록원 (archives.seoul.go.kr)
  • 이태리타월, 2008 여가백서: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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